안경은 세상을 보는 창이며, 패션을 완결하는 잇아이템(it item)이다. ‘안경 쓴 CEO’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도전에 나서는 CEO의 안경을 바꿔보자는 취지로 준비한 기획물이다. ‘좋은 안경’의 기준을 세우고 자신만의 철학을 고집한 최영훈 프레임몬타나 대표가 3번째로 만난 CEO는 우량 중소기업의 상장과 자금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도입된 SPAC(Special Purpose Acquisition Company, 기업인수목적 특수회사)으로 일가를 이룬 남강욱 (주)ACPC 부사장이다.
1999년 창업, 올해 23년째 창립멤버와 함께 회사를 키워가는 남 부사장은 활동적인 이미지 연출을 위해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안경을 쓴다고 한다. 이번에 고른 안경은 밝은 갈색 톤의 동그란 원형의 크라운판토 프레임으로 호기심 가득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짧은 기자생활을 접고 1989년 증권사로 자리를 옮겨 금융인으로 변신한 남강욱 부사장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왔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은 진정성.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면 진정성은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내부 팀워크를 견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들어봤다.
Q 언론계에서 금융계로 이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서울대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프로야구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당시 한국일보 계열사였던 일간스포츠를 선택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일삼아 하려니 고역이었다. 견습기자를 끝으로 이직을 생각했다. 당시 증권시장이 눈에 들어와 굿모닝증권(현 신한투자금융)에 입사했다. 재무제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은 투자분석. 일이 재미있었고, 열심히 했다. 덕분에 IPO(기업공개), M&A(인수합병) 등의 분야에 전문성을 키울 수 있었다.
Q 남강욱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
- 증권계에서 10여년 일하며 쌓아온 노하우로 창업을 한 것이다. 지난 1999년 5월 M&A팀원들과 독립, ACPC(얼라이언스 캐피탈 파트너즈)를 설립했다. 그때 나이 37살. 당시 팀장이자 입사동기였던 이병훈 현 ACPC 대표와 의기투합해 M&A부티크(사설투자자문업체)를 만들고 23년을 버텨온 것은 생존을 위한 도전 그 자체였다. 1억원으로 시작한 자본금은 지금 100억원을 살짝 웃돌고 있다. 당시 금융권에서 뛰쳐나온 수 백개의 부티크가 대부분 짧게는 1~2년, 길게는 5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지만, 우리는 23년을 살아 남아 자본시장에 우뚝 서 있다. 꽃 길도 있었고 가시밭길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팩투자 전문회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Q 가시밭길도 있었다고 했는데, 어떤 위기가 있었고 어떻게 극복했나?
- 키워드는 두 가지다. 팀워크와 진정성. 조직 내부 인력들 간에 팀워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고객을 대할 때는 늘 참된 마음으로 만났다.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독립했던 많은 부티크가 실패한 이유는 딱 한가지. 잘되면 잘되는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내부 구성원들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조직이 갈라져 종국엔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이병훈 대표, 같이 창업했던 변해봉 전무(당시 대리) 등 3명의 멤버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고객과의 믿음도 단단하다. 한 번 고객으로 인연을 맺으면 대를 이어 우리를 찾고 있다.
증권사 시절부터 고객사였던 유상옥 코리아나 화장품 회장과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 최고의 농업회사 농우바이오 고희선 회장과의 인연이 그렇다. 세월을 넘어 2세 경영까지 인연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 최초의 MBO(Management Buy Out)로 웅진그룹 계열사였던 코리아나화장품을 유 회장의 오너십 회사로 만들었고, 농우바이오는 농협에 매각해 유가족들이 12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연 등이 업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 덕분에 ACPC는 의리있는 기업으로 소문나는 계기가 됐다.
Q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인가?
- 2010년 우리나라에 도입된 SPAC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스팩제도는 M&A와 IPO를 섞어놓은 금융제도인데, 원래 M&A 부티크로 시작한 ACPC는 창업 후 15개 회사의 IPO를 성사시키면서 두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투자회사가 되었다. 덕분에 1기 SPAC이 시작될 때부터 여러 증권사의 러브콜을 받았다. 지금까지 21개 기업을 SPAC제도로 자본시장에 상장시키면서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SPAC전문회사로 공인받았다. 지금도 9개의 SPAC을 보유하고 있으며, 올 하반기 3개 SPAC을 추가로 설립할 예정이다. 참고로 지난 10년간 SPAC제도로 국내에서 IPO에 성공한 기업은 100개 정도다.
Q SPAC의 강점과 약점을 이야기해 달라.
- 먼저, 강점은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원금보장형 옵션부 금융상품’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공모금액 전체가 금융기관에 예치되어 3년 안에 합병에 실패하면 소정의 이자와 함께 원금을 돌려받는다. 합병에 성공하면 주가상승에 따른 자본이득을 거둘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ACPC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SPAC의 수익률을 보면 상당히 높다. 약점은 비상장사와 합병전까지는 거래가 활발하지 않아 유동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과 SPAC 공모 이후 합병까지 최소 1년 이상 걸리는 시간적 부담을 들 수 있다. 여유가 있는 일부 자산가들 중에는 여러 SPAC에 자금을 분산투자해 수익을 꾸준하게 올리고 있다.
Q 잘못된 판단으로 저지른 실수 혹은 실패의 기억 한가지만 꼽는다면?
- 창업초기 닷컴 버블에 힘입어 꽤 큰 돈을 벌었다. 흔히 30대에 번 돈은 지키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100억대라는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 돈을 벌었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전략도 실패였다. 공인회계사를 많이 채용해 파트너는 일을 따오고 실무는 회계사에게 맡기자는 전략은 내부 직원들의 초심을 무너뜨리는 자충수가 됐다. 누군가에게 맡기고 스스로 나태해지는 분위기가 조직 내 팽배해졌고, 잔고는 비어갔다. 2004년 어느 날 회사통장 잔고에 몇 백 만원밖에 남지 않아 직원들 월급을 걱정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초기의 야성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심기일전했다. 월급을 대폭 삭감하고 법인카드는 회수했으며, 대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성과 위주로 조직의 분위기를 쇄신, 파트너들의 야성을 살려냈다. 그 덕분에 회사는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Q 이제 남강욱은 무엇을 바꿔야 할까.
- 나이 육십이 되고 보니 이제는 나를 위한 삶보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일을 하고 싶어졌다. 30여년간 직장생활을 통해 일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눈은 기른 것 같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나의 경험을 젊은 친구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책과 음식을 화두로 정했다. 매주 한 권 이상의 책을 읽고 SNS에 정성을 다해 서평을 올린다. 400권 넘는 서평이 쌓였는데 조만간 젊은 직장인에게 필요한 책 50권을 골라 서평집을 출간해 볼 생각이다. 더불어 파인다이닝(fine dining) 위주로 매 주 한두 곳씩 방문해 미식탐방 후기를 올린다.
Q 안경을 선택한 기준이 궁금하다.
- 다양성은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 요소다. 내게 안경은 다양성의 상징이다. 안경 4개를 번갈아가면서 쓰는 데 활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나만의 패션 노하우다. 이번 프로젝트도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리더의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